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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성인들을 보면은 실로 용서의 한계를 알 수가 없는 듯 하다.생존의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그리고 자기주도적 사고를 가진 동일한 모습의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그들은 범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무한적 수준의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십자가에 못박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예수와 악법도 법이라면서 그 악법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트를 비롯해서 인간사에서 실로 자신의 생명을 넘어서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로 경허함과 존경 그 이상의 느낄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그렇다면 과연 용서는 좋는 것인가?용서를 하면은 인두껍을 쓰고 악마도 치를 떨 것 같은 만행을 저지른 그들이 참회를 하고 천사의 삶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너무나도 희박한 것이라 생각한다.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리하지 않고,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용서의 한계는 용서를 통해서 참회의 변화가 가능한 이들에게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용서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유다.
찰리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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